애니 / 정한아 / 문학과지성사 / 2015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을 발견했을 때
고민할 것도 없이 예판을 걸어놓고
택배를 기다리는 마음은
정말이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표지가 좀 독특했지, 라고 회고할 수 있는 그녀의 첫 소설부터
한 권의 소설집과 다른 한 권의 소설을 지나
오랜만에 다시 만난 작가 정한아의 소설집 『애니』
표지부터 뭔가 쓸쓸한 톤인 것이
가을이 시작되면 읽어보아야지 했었는데
개인적으로 ‘오늘부터는 진짜 가을이다!’고 선언한 날부터 열심히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총 8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는데
줄거리도 한 줄 알아보지 않고 책을 구입하는 내가
어쩌다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어서
책을 읽는 동안 이 것이 그녀가 말한 변화인가, 라고 계속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이었다.
그렇지만 몰랐더라면 책을 덮을 즈음에야 눈치를 챘을 것이다.
뭔가, 달라졌는데? 라고. 무심하게.
분명 내가 알던 정한아는 아니다.
나는 그녀가 세상을 보는 시선–밝고 따뜻한-을 좋아했는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거의 바닥과 다름 없는 아래에 놓여져 있고
그들에게 좀처럼 희망적인 상황이란 생겨나지 않으며
그래도 내일은 다르겠지! 하면서 웃으며 끝나는 맺음도 없다.
그러나 그 절망과 우울 속에서도
인물을 다루는 그녀의 손끝은 우아하다고 싶을 정도로 가볍고 따뜻하다.
지쳐 힘든 어깨에 무거운 손을 얹어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머리를 흩트리고 동그란 볼을 쓰다듬어 주는 정도의, 위로.
그렇구나.
무겁고 무서운 일이라고 꼭
그와 동일한 무게의 단어를 사용해야 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
지하철 안에서 흔들리는 몸을 따라 살랑 불었다.
각각의 소설이 다른 위로를 담고 있어서 다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빈방, 예언의 땅, 러브레터 그리고 오픈하우스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기존의 정한아 작가의 글을 마음에 들어 했던 이라면
이 변화를 미리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야 도움이 될 것 같다.
전혀 다른 변화는 아니지만
그녀가 머물던 곳에서
한 발자국, 어딘가로 나아갔다면
그 또한 반가운 일이니.
아내는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그를 떠났다. 그녀가 가방도 꾸리지 않고 오직 몸만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비로소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내는 자신이 떠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그는 아내에게 묻고 싶었다.
- 애니
집 안은 온실처럼 뜨겁고 환했다. 걸러지지 않은 햇빛이 거실 곳곳에 웅덩이처럼 고여, 눈이 부셨다.
- 빈방
“생각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이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마라. 누구나 자기 덫에 걸리는 거란다.”
- 예언의 땅
미로는 키가 크고, 가슴과 엉덩이가 납작하고, 허리가 길었다. 옆으로 서면 종잇장처럼 가느다란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명치 한가운데 볼록 솟아난 동그란 뼈를 좋아했다.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솟아오른 뼈라고 했다. 내가 그 뼈를 만지면 그녀는 무척 부끄러워했다. 우리는 서로의 발가벗은 몸을 마음껏 바라보았고, 가슴을 짓누르다시피 끌어안았고, 발끝을 대고 잠들었다. 그 전의 삶은 사라졌고, 기억나지 않았다.
-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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