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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책갈피

계속해보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 황정은 / 창비




책읽는당 5기로 선정되어

아직 정식 출간되지 않은 황정은 작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페이스북에서 리뷰단 모집 글을 보았을 때는 (4기때 떨어졌기 때문인지)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 중에 황정은 작가의 신작이 있다고 해서 신청했었더랬다.

 

몇 년 전 백의 그림자를 추천 받아 읽으면서 이 작가를 알게 되었고

야만적인 앨리스씨,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꾸준히 그녀의 작품을 만나고는 있었지만

나는 이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백의 그림자는 재미있게 읽었으나

미생한석율의 표현을 빌리자면 섹시한 글까지는 아니어서

내게 그리 선명한 기억을 남기지는 못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출간되었을 무렵, 어떤 자리에서 만난 글쓰기를 좋아하는 여성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황정은 작가라고 말할 때 나는 약간 놀랐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뭔가가 이 작가에게 있는 거구나, 내가 뭔가를 놓쳤구나 싶었던 거지.


그래서 당장에 구입해서 읽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되려 그녀와 나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는 슬픈 결말이.

...

 

한국인은 삼세번이라는데, 이번 책이 우리를 가까워지게 하면 좋겠다-며 신청한 리뷰단이 

덜컥 선정되어 가제본상태로 받아본 황정은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소라, 나나, 나기

어린 시절, 설명하기 복잡한 이상한 구조의 집에 함께 살게 된 인연으로

이제는 가족보다 나은 존재가 된 자매와 한 남자.

 

편모가정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도대체 두 엄마 사이엔 비슷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소라와 나나의 엄마 애자씨는 남편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했고

남편과 사별 후에는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계속 살아내고 있는 여자.

나기의 엄마 순자씨는 억척스럽고 손이 큰 여자, 마음을 쓸 줄 아는 여자

하지만 여자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성별을 지워내고 나기의 엄마로, 가장으로 살아내는 여자.

 

그리고 그들의 세 자식,

대체 이 사람의 삶에 색깔을 띄는 것은 무엇일까 싶은 소라와

결혼은 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 나나와

삯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나기.

 

세 사람 시점의 이야기가 순서대로 나오고

이 이야기의 시간은 겹치기도 했다가 앞서가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엄마의 존재를 지워가고 마는,

그러나 그것을 미움이라고 쉽게 표현할 수는 없는 어떤 감정을 소라로부터 보았다.

사랑스럽고 교활한 나나가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진짜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유별나지 않게, 전심전력을 다해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뜨거움만 남는 것은 아닌 나기에게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오랫동안 완벽하게 잊어가는 법을 배운다.

 

그러니까 이것은,

누구나 다 살아가는 방법.

 

흔히들 고된 하루를 버티듯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철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면 삶에 의욕이 없는 것처럼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세상을 살고 있는데

 

평범하게, 혹은 평범하지 못하게 사는 것이

네가 하루를 버티듯 사는 것이

네 삶은 무의미해, 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모두가 다른 의미를 살고 있는 것뿐,

그러니 우리 모두 계속해보자고.

 

주어진 인생,

최고의 것들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도 나쁘지 않다, 아니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믿으며 사는 삶.

계속,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섹시한 글쓰기는 아니지만

모두가 선을 긋게 할 한 줄을 쓰기보다는

다시 책장을 넘겨 몇 번이고 곱씹어 보게 만드는 문장을 쓰는 작가.

 

바다의 수심처럼

작가들도 어떤 깊이(글쓰기의 깊이가 아니라)로 나눌 수 있다면

황정은 작가는 저 아래, 아주 깊은 곳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그 아래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헤엄치거나 발길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무겁지 않은, 아주 긴 호흡.

한국인은 삼세번이라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버린 거야.

?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 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



요리를 할 때 어찌나 적절하고 절묘하게 간장을 사용하는지나기는 이제 간장을 잘 다루게 되었고 

간장을 잘 다루는 나기가 나는 좋다간장을 다만 검은 것,이라고 말하던 나기와 마찬가지로 좋다

마찬가지로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인 대단하다세상엔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대단하다고 나는 생각해.



이것은 몇번째 태몽인지 모르겠습니다수줍은 듯 일렁이던 달을 생각하자 묘하게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렇구나생각합니다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은 이런 말이었구나

여러 개의 매듭이 묶이는 느낌가슴이 묶이고 마는 느낌.